가끔 스치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폭력적인 장면을 볼 때마다 ‘사랑이 대체 뭐 길래’ 생각을 한다. 저 지경이 되도록 헤어지지도 못한 채 가정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 또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아니므로 함부로 말해서는 곤란할 테지만, 현실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널렸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속박하고, 더 나아가 폭력을 행사하는 일 말이다. 순간 실수했다고, 아끼는 마음이 강해서 그랬다고, 설명은 다양하다. 전혀 수긍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같은 설명이 사회에선 인정받으며, 때론 상대의 마음도 뒤흔든다. 이를 ‘옳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세상 어디에도 그토록 짓밟혀도 괜찮은 삶은 존재치 아니한다.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났다. 책 제목을 접하자마자 나는 우리 사회가 가정 폭력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가장 먼저 생각해 보게 됐다. 이러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에 용기 내어 112 버튼을 눌렀건만, 온몸 가득 멍이 들고 심지어 피가 낭자한 모습을 보고도 경찰은 그냥 돌아간다. 그냥 잠시 부부싸움을 했을 뿐이라며, 남의 가정사에 신경 쓰지 말라는 이야기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 셈이다.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나 여전히 적지 않은 이들이 폭력을 폭력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주저한다. 남존여비 사상이, 가부장적 문화가 더욱 견고했던 과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여성이라면 당연히 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그렇지 아니 할 경우에는 맞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유통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정사가 전부일 수도 있다. 아니, 가정사는 남녀 모두에게 중요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도, 박봉에, 견디기 힘든 상사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관두지 않는 까닭으로 많은 이들은 가족을 꼽는다. 미주알고주알 힘들었던 하루를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세상 모든 이들이 날 외면해도 영원히 내 편으로 남을 수 있는 게 바로 가족이다. 어찌 그런 가족을 사소하다 말할 수 있단 말인가!사례는 끔찍했다. 욕설을 퍼붓고, 머리채를 잡아당겼으며, 뺨을 때리기도 했다. 얼굴이 맞아서 붓고, 뼈가 부러진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지만 몸의 상처보다 더욱 큰 건 마음의 상처 같았다. 당사자는 물론 나 또한 그들이 왜 그렇게 맞아야 하는지,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리 이성적 논리적으로 매 맞는 까닭을 설명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여성들은 하루하루 숨죽여 떠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무기력이 그들을 지배했기에, 폭력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이혼에 대한 사회의 낙인도 그들의 결단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자가 참고 살았으면 되는 것을, 부모는 싫어서 갈라졌다지만 아이들은 무슨 죄냐며 주변에서 그들을 말렸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이들이라면 홀로 경제를 꾸리는 일이 어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긴긴 망설임의 시간을 떨쳐낸 이들은 비로소 ‘생존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 과정이 눈물겨웠다.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아니 됐다. 상담을 받으면서 한없이 추락했던 자존감을 되찾은 그들. 스스로를 위해 비로소 시간을 가졌다. 이제까지 벌어진 일들이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배운 그들은 자신과 같은 아픔을 지닌 이들을 위해 나서기도 했다. 타인의 상처를 보듬으려 들 때마다 제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릴 게 분명함에도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승리자였다. 대개의 경기에서 승리자는 당당하다. 그들의 승리는 칭송 받는다. 아내 폭력 피해 여성들은 승리자임에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혹 남편이 나타나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지, 그들은 매순간 숨죽여 운다. 자신의 그리 아름답지만은 아니한 경험을 기꺼이 타인과 나누고자 한 이들은 제 이름을 밝히지 못했다. 왜 부끄러움이 그들의 몫이어야 하는 걸까. 왜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믿지 않으며, 왜 국가는 이 문제를 사소하게 다루는지, 이제 우리는 물어야만 한다.
나는 아름다운 생존자입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직접 쓴 폭력 현장의 기록
이 책은 여덟 명의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직접 쓴 폭력 현장의 기록이다. 한국여성의전화 부설기관인 ‘쉼터’로 탈출해온 여성들이 열두 번의 글쓰기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글로 썼다. 1987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처음 개설한 ‘쉼터’는 여성폭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자 여성들의 방공호다. 이 책은 쉼터가 세워진 지 3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책이기도 하다. 쉼터에서 토해내듯 쓴 피해 여성들의 글을 보면 남편의 폭력, 아이들과의 생이별, 가정폭력에 무지한 사회 시스템 등을 그들의 언어로 생생히 볼 수 있다.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몰랐던 가정폭력의 현장은 책 한 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고 끔찍하다. 하지만 되려 필자들은 나는 아름다운 생존자 라고 외치며 과거의 끔찍한 경험과 지금 그려나가는 희망찬 삶을 글로 만들어냈다. 우리는 또다시 폭력을 경험하는 듯한 고통을 이겨내고 글을 쓴 필자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귀 기울여야 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가정폭력이란 문제가 ‘사소’하지 않고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앞으로 가정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제도와 정책이 바뀌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들어가는 글 강남역 사건과 가정폭력 사이 | 정희진
하나 내가 만든 다른 세상 | 붉은 노을
탈출, 그 이후.
둘 다시, 빛을 향해 서다 | 에스더
탈출, 그 이후..
셋 아름다운 생존자 | 해나
탈출, 그 이후..
넷 행복한 홀로서기 | 마린
탈출, 그 이후..
다섯 마당 안에 희망을 심다 | 잎싹
탈출, 그 이후..
여섯 잃어버린 시간 | 순영
탈출, 그 이후..
일곱 내일을 꿈꿀 가능성 | 마리아
탈출, 그 이후..
여덟 우리, 열심히 행복해지자 | 사랑
탈출, 그 이후..
나가는 글 당신의 용감한 이야기 | 송란희
쉼터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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