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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읽는 시간

 또 하루를 맞았다. 어제는 몰랐던 오늘이다. 아침에 밥을 챙겨 먹고 메일을 확인하니 생일 쿠폰이 많다. 음력으로 생일을 챙기기에 정확히는 생일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이런 시를 읽는다. 신해욱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날을 생일이라 말한다. 생일 하루를 제외하면 나머지 날들은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혹은 존재의 의미를 잃은 채 살아간다. 그렇게 셈을 하니 괜히 서글프다. 잘못 날아온 쿠폰으로 나를 위한 하루가 늘어가는 우습고 황당한 삶이라니.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중략)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신해욱의 「축, 생일」의 일부)      삶이 길어질수록 비루함은 높게 쌓이고 몸은 요동친다. 젊음이 사라진 육체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차릴 만큼의 생을 살지 않았기에 조정권의 시를 읽으면서 거울을 찾고 투박해진 손등과 가는 주름의 골에 한숨이 터져 나온다. 누구나 산다는 건 같은데 삶의 모양새는 천지차이일까. 권혁웅이 읽고 감상을 담은 『당신을 읽는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처럼 기발하고 재미있으면서 서러운 시를 몰랐을 것이다.      몸이란 각 부위의 시끄러움이요 삐걱거림이니.  두개골, 환기통 없는 흡연실  목줄, 한숨 지나다니는 통로  등, 석탄층 매장돼 있는 곳  흉곽, 제방 공사가 소용없는 늪 (조정권의 「헐벗음」의 일부)      권혁웅은 66편의 시를 사람, 사랑, 삶, 그리고 시로 나눠 들려준다. 황동규, 마종기, 최승자 시인부터 유희경, 신해욱, 오은, 이제니의 시까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가 고른 시라는 이유만으로 읽는 내내 뿌듯함을 감출 수 없다. 어떤 시는 내가 좋아하는 시라서, 어떤 시는 내가 전혀 몰랐던 시라서, 어떤 시는 시보다 권혁웅의 감상이 더 좋아서 그 문장에 젖어든다.  좋아하는 시인 유희경의 시를 권혁웅이 읽어주는 대로 가만히 듣는다.      무를 사러 나왔는데 밑동 잘린 눈이 내린다. 당신, 무얼 상상했 기에 이라도 하얀 눈이 내리나 그렇게, 하얀 눈을 맞으며 걸어간 다 한 사내가 넘어진다 일어나 툭툭 털어내는, 그의 잠바다 흐리 다 익숙한 이미지를 더듬어 다시 눈이 내리고 나는 고요 그 중간 쯤을 올려다본다 내일은 무를 말릴 것이다 나는 오독오독한 그런 상황이 참 재밌어 또 슬프다 함께 사라져 버릴 것들 그리고 잊혀 가는 것들도 (유희경의 「무無」, 전문)      ‘훌훌 털어내던 눈발 같은 추억이 누군들 없겠는가. 지나고 보면 무가 되어버릴 추억이. 내일이 되면 추억은 무말랭이처럼 말라 오그라들겠지. 그걸 “오독오독”씹으며 나는 울거나 웃겠지. 무를 사려 했다고? 잘만 하면 무를 덤으로 얹어주는 이를 만날 수도 있겠군. 일기장이나 앨범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 추억의 ‘무덤’인 것.’ (115쪽) 눈이 올 때마다 나는 누군가의 추억이나 비밀이 될 순간을 상상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생했던 기억이 사라져 눈처럼 녹아버려, 오그라든 무말랭이처럼 생기를 잃어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무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네 생은 아닐까.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의 생이 기필코 놓치지 말아야 할 기억이 있다. 황동규 시인이 어떤 슬픔을 말하려 했는지 나는 짐작할 수 없지만, 권혁웅은 어떤 마음으로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봄을 맞고 곧 마주할 4월의 절망과 슬픔을 본다.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황동규의 「더딘 슬픔 」전문)      ‘죽은 그대가 지금 내게 그러하듯. 내게 남은 것은 여생이지만 그대가 남긴 것은 잔생이다. 가장 아픈 슬픔은 가장 더딘 슬픔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161쪽) 여전히 봄의 계절을 살고 1년 12달이 모두 4월인 삶을 생각한다. 주어진 생과 더불어 사랑하는 이의 잔생을 살아내야 하는 삶을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이미 그들의 삶은 어찌할 수 없는 통곡의 시가 되었을 터. 그럼에도 이런 시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한편의 시도 읽기 어려운 누군가에게 혹은 세상의 모든 시를 읽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지녔던 누군가에게 권혁웅이 읽어주는 시는 보약이 될 것이다. 매일매일 밥을 먹듯 시를 꼭꼭 씹어 먹을 시간이 없다면 쓰지도 않고 몸에 좋은 이런 보약을 지어주고 마셔도 좋겠다.

시는 멀고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곁 가장 가까운 사람을 닮은 것이 아닐까. ‘사람’과 ‘사랑’과 ‘삶’으로부터 언어의 몸을 입고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권혁웅 시인이 이렇게 태어난 아름다운 시들 가운데서도 특히 빛나는 66편의 시들을 골라 엮고, 또 한 편의 시와 같은 해설을 붙인 당신을 읽는 시간 이 출간되었다. 한국시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고른 66편의 시들은, 대부분 2000년 이후에 발표된 시들로 우리 시가 현재 도달해 있는 언어감각과 시적 감수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허만하, 황동규, 마종기 시인부터 유희경, 서효인, 오은 등 1980년대생 시인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뛰어넘는 다채로운 시 세계를 소개한다. 시 한 편과 그에 붙인 재치 있는 해설을 읽으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시’임을, 그렇기에 시를 읽는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1부 사람 ― 아직도 네게로 뻗고 싶은

축, 생일 / 신해욱
- 그게 정말 나일까요?

쓸쓸 / 문정희
- 마음에 샌드페이퍼 문지르는 소리

참 우습다 / 최승자
- 포르르와 흐르르 사이

아내의 잠 / 마종기
- 좌판 위에 누운 새우들처럼

마음의 내과 / 이병률
- 마음에 관한 진단서

아무리 손 내밀어도 닿지 않는 / 정영
- 마음의 동물원에서

카렌다 호수 / 서정춘
- 오리 두 마리, 2럼2럼 건너가네

독일 사탕 개미 / 이제니
- 자 떠나볼까, 그녀의 원더랜드로

줄포에서 / 이상국
- 너는 병든 몸이 아니잖아

스타킹을 신는 동안 / 최정례
- 나라도 그 고지전을 치러야 한다고

물맛 / 장석남
- 물맛은 무(無)의 맛

헐벗음 / 조정권
- 청춘은 몸의 중앙집권제, 노년은 몸의 지방자치제

시래기 / 이기인
- 노인정 앞에서

끈 / 신달자
- 손등에 흐르는 강

오토리버스 / 장경린
- 너 죽은 후에도 노을은

팔월 즈음 / 최영철
- 붉은 카네이션이 수류탄 같아서

지구 뒤꼍의 거인 / 최동호
- 장독대 너머의 신

방귀 / 최서림
- 씩씩하게 행진곡 풍으로

넙치의 시(詩) / 김신용
- 달고나처럼 납작해져서

달의 뒤편 장옥관
- 밥할 때마다 살을 씻는 경상도 사람들

이사 신현정
- 모든 집이 사실은 여관이라는 것을

불주사 이정록
- 부처님이 인연의 끈을 살살 당겨주실 테니

2부 사랑 ― 어느 날 너에게도 사랑이 찾아올 것이다

서귀포 이홍섭
- 당신이 곡비처럼 멈추지 않았음을

당신의 눈물 김혜순
- 얇게 저며진 내 슬픔이 무슨 인증샷이라도 되는 듯이

환승 송재학
- 통통 양과 덩치 씨가 만나서 부비부비,

사랑 박영근
- 주소와 이름을 바꿔도 찾아오는 스토커처럼

그늘 속의 탬버린 이영광
- 지나갔으나 지나가지지 않는

당신의 텍스트 1 ―사랑하는 당신께 성기완
- 당신이라는 책

사랑 그 눈사태 윤제림
- 눈치 없는 두레박처럼 목젖이 오르내리니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박순원
- 사랑의 음모론

소금창고 이문재
- 마흔이라는 것

인공호흡 김이듬
- 마우스 투 마우스 법이 필요해

무(無) 유희경
- 추억은 무말랭이처럼

돌 던지는 생(生) 신용목
- 일부러 흘린 도끼에 맞아 얼빠진 산신령처럼

삽 정진규
- 네게로 외삽하고 싶은 마음 하나

쓸쓸한 낙서 복효근
- 대청소를 하다가 세 시간째 넋을 놓고

저녁 엄원태
- 나도 당신도 되지 못한

봄바람에게 홍신선
- 서툰 접골사가 힘만 센 것 같아서

서리 / 문태준
- 당신이 문을 열 때마다 꽃밭을 펼쳐 보이는

대비(大悲) / 배한봉
- 차마는 일종의 처마

3부 삶 ― 우리의 남은 생애가 생애 너머로 흔들린다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 이 가혹한 변신담 앞에서

45 나누기 21 / 차주일
- 이거야 원, 마흔 중년을 스물 청춘이 만났으니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 행복버스가 온 날

동사무소에 가자 / 이장욱
- 동사무소가 제일 무서워

기차를 기다리며 / 천양희
- 기차, 기다려야 하는 그래서 그토록 긴

멸치의 아이러니 / 진은영
- 취향의 공동체

삼겹살 수사 / 이근화
- 숨죽인 대파처럼 물렁한 마늘처럼

더딘 슬픔 / 황동규
- 잔광과 잔설과 잔여 그리고 잔생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 / 손택수
- ‘뽈끈’이라는 말

잃어버린 중국집 / 서동욱
- 이쪽과 저쪽 사이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히치콕의 5단 서랍장 / 유형진
- 비밀번호는 히치콕

양파 / 김창균
- 양파 담는 그물에 제가 담겨서

호박 / 이하석
- 슈퍼울트라할머니

미니시리즈 / 오은
- 이 모든 게 몽유록이라고

알파벳 공갈단 / 서효인
- 쏼라쏼라 떠드는 자해공갈단들

목욕 / 길상호
- 감나무 한 그루, 이태리타월을 들고 섰네

왕릉 / 김정환
- 옷에 밴 고기냄새처럼

달, 팽이 / 반칠환
- 달팽이 먹으며 반성하기

중국집 오토바이의 행동반경에 대하여 / 유홍준
- 오토바이는 순한 짐승

4부 그리고 시 ― 우리는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 이성복
- 이 시의 아비는 그대가 아니다

마치……처럼 / 김민정
- 말줄임표 안으로의 초대

새앙각시 / 이준규
- 커졌다, 새앙각시!

새 / 장석주
- 그에게 지로용지와 독촉장과 최고장을 보내지 말라

천지간 / 김명인
- 세상에서 제일 큰 사내들

겁난다 / 유안진
- 토닥토닥 자판을 두드리는 손길

횟집 어항 앞에서 / 허만하
- 에필로그 | 언어의 프리즌 브레이크를 위하여